Canon 의 이세계 모험
[가치관] 편안함과 쾌락 사이에 선 우리, 계속 저울질 하며 살아야 할까. 본문
우리의 하루 일과는 쾌락을 갈망하다 저항하는 것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어쩌면 일 평생이 '쾌락 저항 기록'일지도 모른다. 퇴근 후 찾아오는 치킨에 대한 갈망, 게임에 대한 갈망, 도박, 술, 유행, 과잉소비, 연애, 유튜브 쇼츠 등등에 대한 고자극에 대한 갈망. 그러나, 이런 쾌락이 생각만큼 즐겁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쾌락은 갈망할때가 더 흥분되고 즐겁다는 이야기다. 왜일까? 그것은 사회가 우리의 쾌락이 죄책감과 연동되도록 주입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행복과 함께 불안을 느낀 아이들은 항상 편히 즐거워하지 못하듯, 쾌락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는 경우엔 쾌락이 반감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말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오늘 고생했으니, 술한잔 하자!', '시험 끝났으니 게임하러 가자!', '점심은 샐러드 먹었으니 저녁은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면죄가 주어진 상황에서만 죄책감이 반감되어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원하는 선택(공부를 열심히 함) 이후에 따라오는 보상이 곁들어지는 것은 당연히 기분 좋은 일 이지만, 면죄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쾌락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삶에 유해한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쾌락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경향'이 있다. 반면, 쾌락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들며, 그 '과정'을 즐기게 만드는 '경향'도 있다. 우리가 게임을 하고 싶은날엔 그냥 게임 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지, 승리라는 결과만 필요하진 않은 것 처럼 말이다. (우리가 1분만에 이긴 게임보다, 극적으로 이기는 것을 추구하는 이유다). 이러한 모든 쾌락의 특성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쾌락이라는게 그런 특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억지로 쾌락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큰 혼란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머릿 속에서 게임에 대한 생각 또는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쾌락을 얻기위해 한 행동에 큰 후회와 죄책감이 동반된다거나. 특히, 한국에서는 쾌락에 대한 저항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쾌락이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을 이해 못하고 지도하는 모든 트레이너, 학원 강사 등은 사실 전문가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쾌락(게임, 맛있는 음식 등)은 즐겁다' 라는 생각을 만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것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죄'라고 해버리면 절대 그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만든 생각과 마음을 인정해야 그 다음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게임 하고싶다. ㅋㅋ 맞아 게임 진짜 재밌는데' 라고 편하게 인정하고 '불쑥불쑥 재밌는게 떠오르는 군, 원래 게임이 그렇지 뭐' 하는 너그러움은 자칫 게임에 대한 너그러움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너그러움이다. 내가 만든 생각과 느낌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의지이며, 무엇이든 생각하는 것을 허락했기에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나를 불러 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이렇게 쾌락의 존재를 인정한 사람만이 따듯한 마음으로 자신이 원래 하려던 (공부, 운동 등)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공부를 안하면 얼만큼 큰일나는지, 지금 게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와 같은 지도방법은 아무도 효과를 본적 없지만 나만 당할 수 없기에 전달하는 아주 편리한 불량식품일 뿐이다. 자신의 무능을 두려워 하고 유능함만을 느끼려 하는 사람은 결코 유능해질 수 없다. (듣고 있나 1타 강사들)
편안하고 너그러운 마음의 내가 보통 하고 싶은 것은 정말 나를 위하고 내가 되길 바라는 이상적인 삶인 경우가 많고, 그것에 다가가기 위한 행동은 '편안함'의 성질을 띄는 경우가 많다. (독서, 덜짜고 덜단 음식, 음악 감상, 러닝 등). 아쉽게도 이것들은 안한다고 괴로워지지도 않고, 한다고 큰 즐거움을 주지도 않아서 뇌리에 잘 박히지 않는다. 그 결과, 원하는 내가 되고자 할 때, 머릿속에서 '해야 한다'라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그 목소리가 커질 때 그 행동들(운동, 독서, 공부 등)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된다.
가장 왜곡되기 쉬운 것은 내가 무의식 중 '쾌락'적 행동을 '편안한'행동으로 치환하려다 생기는 부작용이다. 편안함과 쾌락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되는 것도 아니다. 게임이 아니라 공부를 해야하고, 티비를 보는 대신 운동을 하고, 치킨을 먹는 대신 샐러드를 먹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게임을 하지 않고, 티비를 보지 않고, 치킨을 먹지 않는 선택이 있는 것이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샐러드를 먹는 선택이 있는 것이다. 각각의 선택은 한다와 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는 것이지. 무엇 대신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애초에 왜곡된 신념이다.
왜냐하면 그 왜곡이 지속될 경우, 운동에 쾌락을 요구하고, 치킨에 편안함을 요구하는 상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행동 자체의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왜곡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회피하고 위안 삼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편안해 질 수 없다.
좋은 예시로, 한국은 최근 '해야 한다'라는 옳고 그름의 강요 사회를 넘어 '자신에게 부정직하더라도 정답인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자기 기만의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 운동의 통증을 '맛있다'라고 표현 하는 것, 공부에서 게임의 특성을 찾으려 하는 것, 샐러드와 닭가슴살에서 자극을 찾으려 하는 것이 모두 자기 기만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 어떤 행동도 좋고 나쁨으로 정의할 수 없어서 그것만의 특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특성을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혼란은 가중 된다. 운동의 통증과 활력은 동시에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공부의 호기심과 정적인 면도 동시에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것은 '맛있다'거나, '스피드 퀴즈의 재미' 등으로 표현 하는 순간 매우 일부분만을 한정적으로 보게 되므로, 실은 이 모든 행동이 우리의 불안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워서 티비를 볼수록 건강해지고 똑똑해지는 세상이라고 하면 과연 우리가 저런 '장점만 느끼려는' 노력을 했을까? 안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정말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쾌락을 있는 그 자체로, 또 정적이고 개발이 필요한 활동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탐사해야한다. 쾌락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당신은 영원히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끝없이 저항하며 선택하게 될 것이나. 쾌락을 제대로 인정하고 바라봐 준다면 당신은 그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두 선택은 그 자리에 있을 뿐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나의 두려움이 나와 다투고 있을 뿐이다.
'가치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치관] 몸은 무엇인가 - 내 삶과 몸의 관계 (0) | 2025.07.13 |
---|---|
기초와 응용에 대해서 - 의미는 얻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 (8) | 2025.06.08 |
[바디이슈] 나의 마음과 행동이 다른 원인을 찾아내기 (0) | 2025.04.20 |
[바디 이슈] 미각도 오롯한 감각이다-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올 때 대처하는 방법 (0) | 2025.04.03 |
불안과 갈등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는 법 (0) | 2024.08.01 |